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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기/일기

십일월

by dreamgirl 2022.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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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1
내가 하는 일은 누군가가 조금 편해질 수 있는 일인 지언정
사람을 살리는 일일수가 있을까
몸에는 삶을 담고 있다. 어떤 삶을 짊어 왔는지 어디가 아프고 괜찮은지 말하고 있으니까. 당신의 작은 체구로 삶의 역경을 보냈을 시간들.
눈물이 아니면 말할 수 없는 그간의 세월들

11.02
나로 돌아가는 길. 엄마는 아쉽기만 한가 봐.
차라리 그와 살기보다는 혼자 살았으면 할 정도로 그와의 삶이 힘겨울까 봐 걱정한다.
서울에서의 짐 정리도 오로지 나 혼자 해내야 하는 걸. 막막하기도 하고, 모든 걸 비우고 다시 시작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정리하는 것 또한 별거 없지. 미련의 짐이라면 언제든 정리해야 하니까.

11.03
스타킹을 신고 원피스를 입고 회사에 다녀왔는데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다리가 붓는다.
웬만하면 수술을 안 하고 싶지만 서른이 되면서 다리가 자주 붓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번 쉬는 동안 하지정맥류도 시술받고
정맥 개선을 해보자. 오래 좀 더 편하게 살기 위함이며 그동안 9년 동안 보험도 냈는데 한 번쯤은 혜택도 보자.
엄마랑 같이 재활 겸 휴식이 되겠구나. 파이팅!

11.04
엄마 퇴원과 대학 친구들과 잠실에서 데이트



11.06
이삿짐 싸고 모동으로 옮기기
이사할 때마다 가족들이 도왔다. 고향집에는 내가 써 온 물건들이 많이 있다는 걸 엄마와 같이 옷장을 정리하면서 깨닫다. 옷걸이, 바지걸이, 내가 그린 그림, 추억에 싣고 있는 물건들.
그래서 고향 가면 푸근하고 편안한 거였구나.

11.07
포도밭 집게 정리
엄마와 아빠, 오빠 옷장 정리

11.08
검은콩 밭에서 수확
결자해지를 생각하며 닭장과 태양열 가림막에 심은 수세미를 수확하다. 고향집을 오며 가며 마음이 쓰였는데 어느새 한쪽은 갈색 수세미, 한쪽은 초록 수세미로 자랐다. 가을에는 수세미 줄기도 열매를 만들고 난 뒤 지푸라기처럼 변했다.
아직은 잘 쓸지 모르겠지만 수세미 수확은 성공이다.
그리고 엄마와 창고 정리

11.09
아플 때 곁에 가족이 있다는 것 참 든든하다. 수술 전 차가운 손을 오빠가 따뜻한 손으로 잡아주다.
수술을 하고 깨어났을 때도 혼자가 아니고 보호자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는 걸 왜 이제 안 걸까
그동안 혼자 할 수 있음 혼자 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가족들에게는 투정 부려도 되었는데.

11.10
엄마의 조직검사 결과를 보고 오다. 그렇게 큰 물혹이 자궁처럼 컸다는 게 놀라웠고 참말로 다행인 게 악성이 아니라는 점.
앞으로 부모님이 주기적으로 건강 검진을 받을 수 있게 노력해야겠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으니 도왔다는 친구의 말도 멋지고 고마웠다.


11.12
비교하지 않고 욕심부리지 않고 순리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인데
앞으로 그래도 될까. 수많은 서울의 불빛을 보며 이렇게 넓은 곳에서 9년을 살았다는 게 꿈만 같기도 해.
내일은 내일의 하루가 있어 파이팅!


11.15
오늘 컨테이너 집 추가 공사가 있어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다.
밤과 새벽까지 거친 바람으로 실내에 찬 공기가 들어와 추웠다.
본가로 들어가 할 일을 찾아서 가족들 모자를 빨고, 집에서 사용할 식기와 옷가지 짐을 풀다.
그리고 아빠가 cctv 연결이 안 되어 있다고 확인을 해주니 오후 시간이 금방 가버렸다. 그 사이 마지막 월급과 서울 집 보증금이 들어왔다. 엄마에게 시댁 살이 하는 것 같다며 힘든 내색을 했더니 결혼생활이 이런 거라고 하셨다.
매 끼니에 밥 차리고 설거지하고 시간이 엄청 간다. 그래도 오빠의 공부를 돕고 소설책을 읽으며 뇌를 쉬게 해야지. 오늘도 수고했다.

11.17
마늘 빻는 일로 시작해서 저녁까지 끝나다.
그래도 내년 한 해 먹을 마늘을 다 졌다고 생각하니 뿌듯하다.
오빠와 한글과 구구단을 공부한다. 하기 싫다고 하면서도 사랑방에 찾아와 한 시간 넘게 공부하는 오빠가 대견스럽다.



11.18
손 도리깨로 콩 타작기
내가 일을 잘 못해서 도리깨가 부러졌다. 엄마는 생각보다 서리태 콩 수확을 두말 반 했다고 좋아하셨다.
내년에는 콩 농사를 하지 않고 올해 수확한 콩을 알뜰하게 먹기를 바란다.

11.19
컨테이너 별채에 도배를 하다. 한 시간이면 끝낼 줄 알았던 도배가 세 시간이 넘게 걸렸다.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직업을 선택하는 건 본인이겠지만
그 일을 계속해나가는 건 어떤 힘일까


11.22
그의 집에 와서 청소하고 음식을 하고 그에게 밥을 차려준다. 오늘은 그의 집으로 전입 신고하다. 6개월 이내에 취직을 하거나 사업체를 운영하게 된다면 전입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전입 신고하며 쓰레기봉투 20리터 한 묶음을 전달받다.
우리는 이 도시에서 계속 살게 될까.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며 지냈던 도시. 좋았던 기억이 남은 도시. 우리가 작게 시작하며 지낼 이곳, 오래 걸려 다시 돌아온 만큼 부족해도 이해하며 살자. 친구야

11.23
집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커피도 마시고 노트북으로 그동안 업계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세미나도 들었다.
저녁은 푹 쉬어야지. 그와 함께 월드컵 축구를 본다.



11.24
과메기가 제철이라 각자 부모님께 드리려고 먼 길을 여행 삼아 포항에 다녀왔다.
운전하면서 노래 듣는 거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노래를 틀면 선곡을 요청하는 그.
4시간을 이런저런 이야기 하며 다녀왔네. 고마워.
가족들이 제철 방어회와 과메기를 먹을 수 있게 해 줘서. 다음에도 또 부탁해.

11.25
서울에서의 정리. 그와 같이 살기 위한 짐 정리가 거의 끝나고 그날이 찾아왔다. 이번 주간은 몸이 유독 지친다.
그래도 틈틈이 읽어서 책 한 권을 뚝딱 해치우다. 내일은 서울 친구 결혼식. 이제 앞으로 서울 갈 일이 얼마나 있으려나.
까까가 먹고 싶다니까 아빠가 늦은 저녁 산타처럼 맛난 과자를 사 왔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문을 잠그고 혼자 쉬다가 가족들과 함께할 시간들이 아쉬워서 엄마한테 같이 드라마 보자고 꼬셨다. 우리가 함께 있는 시간 최대한 소중히 보내자.
행복하게 기억될 수 있게




11.26
겨울을 잘 나고 새 봄이 되면 빛나게 나가야지
떠오르는 태양과 맑은 공기 마시며 결혼식을 가려고 집을 나오다. 그러면서 부모님의 고향집이 불편한 것은 많아도 가장 아늑한 낙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내 집이 없다니 그것이 슬플 뿐.
난 아주 쉬는 게 아니라 잠깐 멈춘 것뿐이야
사람들이 알아준다면 꼭 널 알아볼 거야
어떤 일을 할까 하고 싶은 걸까 계속 생각한다.

11.27
부모님 일을 도우며 일을 하다 보면 머리가 아닌 몸에 익혀서 하게 되는 일이 있다.
그것은 생각보다 탄력을 받으면 받을수록 금방 하게 되고 끝이 나있다.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드는 만큼 서두르지 말고 건강하게 일하며 나이 들고 싶다.
우리 집에서 20년 넘게 일하신 재호 아줌마가 돌아가셨다. 부디 좋은 곳에 가셔서 편히 쉬셨으면 좋겠다.
이 세상에서 고생하고 아팠을 시간을 보상받았으면 좋겠다. 아빠가 장례식장에 다녀와서 느꼈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남은 시간을 알 수 없겠지만 하루하루 후회 없이 살자!

11.29
오랜만에 비 다운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작년 겨울에는 눈이 내리지 않아 가물었단 엄마의 얘기를 듣고
온 산과 들에 눈과 비가 많이 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11.30
그리고 비가 내린 후 한파가 찾아오다. 우리는 오늘 20포기 넘게 김장을 하기로 했는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11시도 안 되어서 끝이 났다. 맛있게 김장을 끝내고 굴과 보쌈과 같이 점심을 먹었다.
이렇게 힘든 일을 엄마는 매년 해냈다니 존경스럽다. 음식은 우리의 내일을 빛나게 하는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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